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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4

티어스의 법칙

지난 글에서 그레셤의 법칙을 봤다. 악화가 양화를 쫓아낸다. 좋은 돈은 서랍에 넣고 나쁜 돈부터 쓴다. 그런데 역사에는 정반대 장면도 있다. 가게 주인이 나라 돈을 받지 않겠다고 고개를 젓는 장면이다.

1. 그레셤의 법칙에는 조건이 있다

그레셤의 법칙이 통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두 돈이 같은 값으로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법이 "이 동전도 저 동전도 똑같이 1실링이다"라고 정해 두고, 받지 않으면 처벌하니까 사람들은 나쁜 돈을 내밀고 좋은 돈을 숨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은 이 법칙을 "같은 값으로 교환될 때 악화가 양화를 쫓아낸다"고 고쳐 말해야 정확하다고 했다(위키백과, 그레셤의 법칙).

그렇다면 묶어 둔 끈이 풀리면 어떻게 될까. 파는 쪽이 어떤 돈을 받을지 고를 수 있다면, 누구도 값이 녹아내리는 돈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좋은 돈이 나쁜 돈을 시장에서 밀어낸다.

2. 이름은 티어스의 법칙

스위스 경제학자 페터 베른홀츠는 이 반대 현상에 프랑스 정치가이자 역사가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의 이름을 붙였다. 그의 책 『화폐 체제와 인플레이션』(2003)에서다. 우리말로는 티에르의 법칙, 또는 영어 발음을 따라 티어스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베른홀츠는 이 법칙이 인플레이션의 뒷부분에서 나타난다고 봤다. 환율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물가가 너무 빨리 올라 사람들이 그 돈을 들고 있으려 하지 않을 때다(위키백과, 그레셤의 법칙).

국제통화기금(IMF) 연구자들도 1992년 논문에서 중남미의 달러화 현상을 "거꾸로 된 그레셤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달러가 법정 통화가 아니었고, 때로는 쓰는 것이 불법이었는데도 사람들이 달러를 골랐다는 점이 핵심이다.

3. 바이마르 독일: 1조 마르크와 1렌텐마르크

1923년 독일의 종이 마르크는 거의 휴지가 됐다. 그해 11월에는 1달러가 약 4조 2,105억 마르크였다. 공식 화폐가 너무 값없어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받지 않으려 했고, 농부들은 식량을 쌓아 두었으며, 물건에 기댄 다른 돈이 거래에 쓰였다고 역사가들은 적었다. 결국 1923년 11월 15일 렌텐마르크라는 새 돈이 나왔고, 종이 마르크 1조 개가 렌텐마르크 1개로 바뀌었다(위키백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 위키백과, 렌텐마르크).

4. 짐바브웨: 100조 달러 지폐 다음

짐바브웨는 2008년 11월 중순 물가가 정점을 찍었다. 100조 짐바브웨달러짜리 지폐까지 나왔다. 가게들은 짐바브웨달러로 값을 매기는 물건을 점점 줄였고, 사람들은 짐바브웨달러를 받으면 곧바로 암시장에서 외화로 바꿔야 했다. 2008년 12월 중앙은행은 약 1,000개 가게에 외화 거래를 허가했고, 허가 없이 외화를 받는 가게와 노점도 많았다. 2009년 1월에는 정부가 미국 달러와 남아공 랜드 같은 외화 사용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다(위키백과, 짐바브웨의 초인플레이션). 법이 먼저 바뀐 게 아니라, 시장이 먼저 나라 돈을 버렸고 법이 뒤따랐다.

5. 에콰도르와 베네수엘라: 달러를 고른 사람들

에콰도르의 수크레는 1999년 한 해 동안 달러 대비 가치의 67%를 잃었다. 2000년 1월 9일 대통령은 미국 달러를 공식 통화로 삼겠다고 발표했고, 수크레는 1달러에 2만 5,000수크레로 바뀌었다. 달러는 2000년 3월 13일 법정 통화가 됐다(위키백과, 에콰도르 수크레).

베네수엘라는 공식적으로 달러화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2020년대 초 민간 조사들은 거래의 절반 이상이 달러로 이뤄진다고 추정했다. 정부 발표는 훨씬 낮았지만, 사람들이 볼리바르보다 달러를 원한다는 방향은 같았다(블룸버그 보도, 2021).

6. 비트코인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망가진 돈』의 저자 린 알든은 그레셤의 법칙이 고정 환율뿐 아니라 세금 같은 마찰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비트코인으로 물건을 사면 양도 차익에 세금이 붙을 수 있으니, 사람들은 법정화폐를 먼저 쓰고 비트코인은 아껴 둔다. 그리고 끝에 가면 상인이 약한 돈을 거부하는 티어스의 법칙으로 넘어간다고 알든은 쓴다.

이것을 순서로 읽으면 이렇다. 처음에는 좋은 돈을 모은다(그레셤). 나쁜 돈이 충분히 나빠지고 사람들이 고를 수 있게 되면, 파는 쪽이 좋은 돈을 요구한다(티어스). 바이마르와 짐바브웨에서는 그 좋은 돈이 외화와 물건이었다. 다만 이건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에서 나온 장면이고, 원화나 달러가 그렇게 될 거라는 예언은 아니다. 지금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트코인은 첫 단계, 모으는 단계에 있다.

7. 정리

그레셤의 법칙은 법이 두 돈을 같은 값으로 묶을 때 통한다. 그 끈이 끊기면 사람들은 나쁜 돈을 거절하고 좋은 돈을 고른다. 독일은 1조 마르크를 1렌텐마르크로 바꿨고, 짐바브웨에서는 시장이 먼저 달러로 넘어갔고, 에콰도르는 아예 달러를 들여왔다.

돈은 결국 받는 사람이 고른다. 발행하는 쪽이 마음대로 늘릴 수 없고, 누구의 허락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돈이 있다면, 고를 수 있는 순간 사람들은 그쪽으로 간다. 비트코인이 답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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