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은 전자 현금이 되겠다고 했는데 왜 다들 쓰지 않고 쟁여 두기만 할까. 실패의 증거일까, 아니면 오래된 법칙대로 움직이는 걸까.
1. 그레셤의 법칙
그레셤의 법칙은 한 줄로 "악화가 양화를 쫓아낸다"로 요약된다. 가치가 다른 두 가지 돈이 같은 액면으로 통용되어야 할 때, 사람들은 값어치가 높은 쪽은 쟁여 두고 낮은 쪽만 쓴다는 것이다. 가게에서는 닳고 순도 낮은 동전부터 내밀고, 질 좋은 동전은 서랍에 넣는다. 시장에는 나쁜 돈만 돌게 된다.
용어를 먼저 정리하면, 액면가는 동전에 새겨 둔 가치이고 실질 가치는 그 동전을 금속으로 녹여 팔았을 때의 값어치다. 둘의 차이가 벌어질수록 사람들은 실질 가치가 높은 쪽을 아낀다.
법칙에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있다. 16세기 영국의 금융가 토머스 그레셤(1519년경~1579년)이다. 그런데 그가 이 원리를 정식으로 정리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 경제학자 헨리 매클라우드가 그의 이름을 붙였고, 비슷한 관찰은 기원전 5세기 말 아리스토파네스, 1519년 코페르니쿠스, 중세의 니콜 오렘도 했다(위키백과, 그레셤의 법칙). 그레셤이 한 일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훼손된 영국 화폐를 바로잡으라고 권한 것이다(위키백과, 토머스 그레셤).
2. 국가가 돈의 품질을 낮췄을 때
정부가 재정이 급하면 금화와 은화의 순도를 낮추곤 했다. 같은 금속으로 동전을 더 많이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헨리 8세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원정 비용과 방탕한 지출 때문에 돈이 필요했다. 1542년 5월 비밀리에 금화와 은화의 귀금속 함량을 줄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1544년 낮은 함량의 동전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1545~47년에는 금이 20캐럿, 은은 33%까지 내려갔다. 사람들이 좋은 동전은 감추고 나쁜 동전만 쓰자 질 좋은 동전이 유통에서 사라졌다. 은을 입힌 구리 동전이 닳아 속의 구리가 드러나자 왕에게는 '구릿빛 코'라는 별명이 붙었다. 같은 금속으로 더 많은 동전을 찍어 국가의 몫을 늘리는 방식이다. 이 상태는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560년, 그레셤의 조언으로 나쁜 동전을 거둬들이고 정상 순도의 동전을 새로 찍은 뒤에야 정리됐고, 이 재주조로 왕실은 약 5만 파운드를 벌었다(위키백과, 대악화).
조선의 당백전도 비슷하다. 1866년 조정이 경복궁을 다시 짓는 비용을 대려고 만든 이 동전은 액면이 100문이어서 기존 상평통보의 100배로 통용되게 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인정받은 실제 가치는 5~6문 정도였다고 한다. 쌀값은 1866년 12월 한 섬에 약 700문에서 이듬해 4,000문이 넘게 뛰었고, 사람들은 상평통보를 쟁이고 당백전만 썼다. 발행은 1867년 5월에 멈췄고, 1868년 10월에는 당백전을 공식 폐지해 낮은 비율로 환수했다(위키백과, 당백전). 약 6개월 동안 약 178만 개가 찍혔다.
3. 가치를 지킨 돈은 오래 쓰인다
순도를 낮춘 돈은 쟁여지지 않고 쓰이다 사라졌고, 순도를 지킨 돈은 오래, 멀리 쓰였다.
비잔틴 제국의 금화 솔리더스가 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2년경 다시 대량 유통시킨 이 금화는 무게 약 4.5g에 순도 95.8%(23캐럿) 안팎을 유지했고, 10세기까지 무게와 순도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약 7세기 동안이다. 11세기에 황제들이 함량을 줄이기 시작하면서 신뢰가 무너졌다. 솔리더스는 유럽 중세에서 은화 12개에 해당하는 계산 단위로 쓰였고, 프랑스어 수(sou), 이탈리아어 솔도, 영어 실링이라는 이름의 뿌리가 됐다(위키백과, 솔리더스)). 가치를 지킨 돈이 멀리까지 쓰인 사례다.
4. 비트코인에 적용하면
비트코인의 백서는 제목부터 『비트코인: 개인 대 개인 전자 화폐 시스템』이다.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의 저자가 2008년 10월 31일에 공개했다(bitcoin.org). 처음 목표가 결제 수단이었다는 이야기다. 비트코인의 총발행량은 2,100만 개로 정해져 있고, 2026년 중반 기준으로 약 2,000만 개가 이미 발행됐다.
실제 사용은 다르게 흘렀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2010년 5월 22일의 피자 거래다. 한 프로그래머가 비트코인 1만 개를 줄 테니 피자 두 판을 보내 달라고 포럼에 글을 올렸고, 캘리포니아의 한 청년이 응했다. 그때 1만 개의 가치는 약 41달러였다(위키백과, 비트코인 피자 데이). 지금은 같은 개수가 훨씬 큰 가치가 됐으니, 이후 많은 사람이 쓰기보다 모아 두는 쪽을 택한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레셤의 틀을 쓰면 이렇게 읽힌다. 월급은 원화나 달러로 받는다. 이를 생활비로 쓰고, 오래 가치를 지킬 것 같은 돈은 쓰지 않고 모은다. 이 틀에서는 쓰지 않고 모으는 행동이 비트코인의 약점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좋은 돈이라고 믿는 대상에 대해 보여 온 오래된 습관과 닮았다.
5. 정리
쓰지 않고 모으는 것은 비트코인의 결함이 아니다. 순도 낮은 동전은 내밀고 좋은 동전은 서랍에 넣던 습관 그대로다. 월급은 원화나 달러로 받아서 쓰고, 오래 값을 지킬 것 같은 돈은 모아 둔다.
역사에서 정부가 함량을 낮춘 돈은 나쁜 돈이 됐다. 헨리 8세의 동전이 그랬고 당백전이 그랬다. 반대로 순도를 지킨 솔리더스는 7세기 동안 쓰였다. 돈이 값을 지키려면 발행하는 쪽이 마음대로 질을 낮출 수 없어야 한다. 비트코인은 총발행량이 2,100만 개로 정해져 있다. 함량을 몰래 줄이듯 공급을 늘릴 수 없는 돈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쓰지 않고 모으는 건 당연하다. 비트코인이 답이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 Gresham's law (Wikipedia, 2026 열람) — 법칙의 정의, 매클라우드의 명명, 이전 관찰자들
- 위키백과 — Thomas Gresham (Wikipedia, 2026 열람) — 그레셤의 생몰, 엘리자베스 1세에게 화폐 개혁을 권한 사실, 법칙을 직접 정식화하지 않았다는 점
- 위키백과 — Great Debasement (Wikipedia, 2026 열람) — 1542~1551년 영국 대악화, 은 33%, 좋은 동전 퇴장, 1560년 재주조
- 위키백과 — 당백전 (한국어 위키백과, 2026 열람) — 1866년 발행 목적, 액면 100문과 실제 가치 5~6문, 쌀값 급등, 발행 중단과 폐지
- 위키백과 — Solidus (coin)) (Wikipedia, 2026 열람) — 콘스탄티누스의 재도입, 4.5g·순도 유지, 11세기 함량 저하, 중세 유럽의 계산 단위
- bitcoin.org —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bitcoin.org) — 백서의 제목과 저자 표기
- 위키백과 — Bitcoin Pizza Day (Wikipedia, 2026 열람) — 2010년 5월 22일 비트코인 1만 개로 피자 두 판을 산 거래, 당시 약 41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