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헌터x헌터를 다시 정주행하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 넨의 '제약과 서약' 규칙, 이거 완전 비트코인 아닌가.
안 본 사람을 위해 짧게 설명하면, 헌터x헌터 세계관 속 능력자들은 '넨'이라는 힘을 쓴다. 근데 이 넨에는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운 법칙이 하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무거운 제약을 걸수록, 능력이 폭발적으로 강해진다.
크라피카는 '환영여단에게만 이 사슬을 쓴다, 어기면 죽는다'는 서약을 걸고, 그 대가로 자기보다 훨씬 강한 적조차 봉인하는 사슬을 얻었다. 제약이 무거울수록 능력도 무거워진다는, H×H에서 가장 시적인 룰이다.
비트코인 = 제약 덩어리
세상은 비트코인을 '디지털 화폐'라고 부르지만, 나는 좀 다르게 본다. 화폐의 형상을 한, 거대한 제약 덩어리라고.
생각해보면 비트코인엔 말도 안 되게 많은 제약이 깔려 있다.
- 발행량은 평생 21,000,000개. 단 한 개도 더 못 찍는다.
- 블록은 10분에 하나. 빨라질 수도 없다.
- 새 코인을 얻으려면 전기를 태워야 한다. 공짜가 없다.
- 키를 잃으면 영원히 끝. 고객센터도 없다.
- 누구도 룰을 못 바꾼다. 사토시조차도.
상식적으로 보면 최악의 화폐다. 느리고, 책임 무겁고, 양은 적고, 실수하면 그걸로 끝. 근데 이 제약 하나하나가, 비트코인의 '능력'이 된다.
제약을 능력으로 바꿔보면
하나씩 매칭해보자.
21,000,000개 발행 한도라는 제약은 → 희소성, 인플레이션 면역이라는 능력이 된다.
PoW로 전기를 강제로 소모해야 한다는 제약은 → 건전 화폐라는 능력이 된다.
셀프 커스터디, 본인이 100% 책임져야 한다는 제약은 →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주권이라는 능력이 된다.
중앙기관이 없다는 제약은 → 검열 저항이라는 능력이 된다.
10분 블록에 6컨펌까지 느리게 확정된다는 제약은 → 한 번 적히면 끝인 불변성이라는 능력이 된다.
어디서 본 패턴 아닌가. 제약이 무거울수록 능력이 무거워진다. 비트코인은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능력자가 화폐에 건 거대한 서약이다. 그리고 사토시는 그 서약을 어기지 않으려고, 본인이 먼저 사라졌다.
반대편엔 '제약 없는 능력'이 있다
반대편을 보면 이해가 더 쉬워진다. 법정화폐 — 달러, 원화. 비트코인의 정확한 반대편에 있다.
- 발행량 한도 없음. 무한 인쇄 가능.
- 발행 비용 없음. 키보드 한 번이면 끝.
- 책임 주체는 은행과 정부. 내 돈이 사실 내 것이 아니다.
- 검열 가능. 계좌 동결 한 방이면 끝.
- 송금 취소 가능. 영원한 게 없다.
H×H 식으로 말하면 법정화폐는 제약 0짜리 발동체다. 편하고, 강력해 보이고, 빠르다.
근데 H×H를 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제약 없이 얻은 능력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배신한다.
법정화폐의 능력명은 '인플레이션'이다. 내가 자는 동안 매년 데미지를 입힌다. 무방비로.
결론
비트코인을 이해한다는 건 차트를 읽는 게 아니다. 제약을 이해하는 거다. 왜 21,000,000이어야 하는지, 왜 셀프 커스터디여야 하는지, 왜 10분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제약 하나하나가 어떻게 능력이 되는지를.
능력의 크기는, 서약의 무게에 비례한다.
이게 H×H의 룰이자, 비트코인의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