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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6

bitcoin X fate

황금 갑옷의 왕이 무수한 검을 날리고 붉은 코트의 궁수가 같은 검으로 맞받는 사이에 비트코인이 떠 있는 일러스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를 다시 보다가, 길가메쉬와 에미야 아처의 관계를 보면서 문득 비트코인이 겹쳐 보였다.

상성이라는 우아한 룰

페이트 세계관엔 '서번트'라는 영령들이 있고, 이들에겐 클래스가 있다. 세이버, 랜서, 아처, 라이더, 캐스터… 그리고 이 클래스 사이엔 가위바위보 같은 상성이 있다. 세이버는 랜서를 견제하고, 랜서는 아처의 거리를 좁히고, 아처는 세이버의 사정거리 밖에서 처치한다.

능력의 절대값보다, 상성의 방향이 결정적이다.

검사가 아무리 세도, 활을 정확히 든 자에겐 거리에서 무너진다. 모든 강함은 자기 모양에 맞는 약점을 갖는다는 게, 능력자 배틀물을 관통하는 룰이다.

길가메쉬가 유일하게 경계한 남자

페이트에서 가장 강력한 캐릭터로 꼽히는 길가메쉬의 능력은, 모든 보구의 원본을 소장한 보물창고 '게이트 오브 바빌론'이다. 적을 보면 보구를 무한대로 던져서 압살한다. 정면 승부에선 사실상 사기캐다.

근데 이 절대강자조차 단 한 명, 에미야 아처만은 끝까지 경계했다. 에미야는 검사도 영웅도 아니다. 그의 능력은 본 적 있는 모든 무기를 복제하는 것. 길가메쉬가 보구 100개를 던지면 에미야는 100개를 복제해 받아친다. 양으로 압도하는 능력이, 양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능력을 만나는 순간 무력해진다. 절대강자 본인이 자기 천적의 정체를 가장 잘 아는 셈이다.

현실의 길가메쉬 = 달러

현실 세계로 옮겨보면, 길가메쉬 포지션엔 달러가 있다. 달러의 보물창고를 열어보면 이렇다.

어떤 나라도, 어떤 기업도, 이 보물창고를 정면으로 못 이긴다. 유로도 위안도 엔도 그냥 다른 종류의 검과 창일 뿐, 같은 상성 안에서 싸우는 한 답이 없다.

강함의 출처가 곧 약점이다

근데 모든 절대강자에겐 약점이 있다. 달러의 약점은 정확히 하나, '무제한 발행' 그 자체다. 이게 달러의 능력이자 동시에 약점이라는 게 핵심이다.

1971년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달러는 사실상 뭐든 찍어낼 수 있는 화폐가 됐고, 그 이후로 달러의 구매력은 큰 폭으로 깎여나갔다는 게 흔히 인용되는 얘기다. 2020년엔 코로나 대응으로 1년 만에 달러 공급량이 큰 폭으로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인쇄기를 돌릴 때마다, 이미 달러를 들고 있는 모든 사람이 자는 동안 조금씩 가치를 잃는다.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문제는 이 약점이 능력의 출처라는 것. 달러가 세계를 지배하는 건 무한히 찍을 수 있어서고, 그 인쇄가 모든 보유자의 가치를 갉아먹는다. 보구창고가 클수록, 그걸 복제해서 되돌려줄 자가 가져갈 몫도 커지는 셈이다.

비트코인, 정확히 그 약점만 노린 카운터

비트코인의 설계도를 펴보면, 신기하리만치 달러의 약점만을 향해 조준돼 있다.

달러의 약점비트코인의 대응
무제한 발행21,000,000개 절대 고정
추적·동결·제재검열 저항 — 거래를 막을 단일 지점이 없음
중앙 권한탈중앙화 — 멈출 수 있는 주체가 없음
정치·국가 리스크국가 무관, 전 세계 공통 규약
지속적인 인플레이션반감기로 4년마다 발행량 절반

이건 우연이 아니다. 비트코인은 그냥 새로운 화폐가 아니라, 달러라는 거대 능력의 약점만을 정확히 노린 카운터다.

길가메쉬가 에미야를 끝까지 경계한 이유와 똑같다. 다른 화폐들은 같은 룰 안에서 싸웠지만, 비트코인은 발행 권한이라는 룰 자체를 폐지해버렸다. 각국 정부가 비트코인을 규제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절대강자 본인이 자기 천적의 정체를 가장 잘 알기 때문 아닐까.

결론

이 카운터를 결국 누가 들고 있느냐가 진짜 질문으로 남는다. 은행이나 거래소가 대신 들어주면, 카운터의 의미는 사라진다. 같은 룰로 돌아가버리니까. 비트코인은 각자가 각자의 자산을 각자 직접 든다는 전제 위에서만 카운터로 작동한다.

절대강자 본인이, 자기 천적의 정체를 가장 잘 안다.

비트코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이 상성 관계를 이해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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