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해마다 싸진다. 내년이면 같은 값으로 더 큰 화면을 살 수 있다는 걸 모두 안다. 그런데 왜 다들 오늘 TV를 살까.
1. 기다리면 싸지는데도 산다
디플레이션, 곧 물가 하락을 두려워하는 논리는 이렇다. 값이 내릴 거라 예상하면 사람들은 사지 않고 기다린다. 기업은 물건이 안 팔려 생산을 줄이고, 일자리가 줄고, 물가는 더 내린다. 악순환이다.
『The Big Print』의 저자 로런스 레퍼드는 TV로 반박한다. 5년 뒤 더 싸질 걸 알아도 오늘 경기를 보고 싶으니 오늘 산다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은 다음 달 빵값이 내린다고 굶지 않는다.
전자제품은 이 말을 매일 증명한다. 앞 글 「같은 돈, 다른 물가」에서 본 것처럼 미국 소비자물가의 TV 항목은 2000년 이후 약 98% 내렸다. 그 사이 TV와 컴퓨터를 만드는 산업은 사라지지 않았다. 만드는 비용이 더 빨리 내렸기 때문이다. 가격이 내려도 비용과의 간격, 곧 마진이 남으면 기업은 버틴다.
2. 1870년대 미국: 물가는 내리고 생산은 늘었다
나라 전체로도 그랬을까. 미니애폴리스 연준이 정리한 미국 소비자물가 장기 자료(1967=100)로 보면 물가 지수는 1869년 40에서 1879년 28로 10년 동안 약 30% 내렸다.
같은 기간 경제는 어땠을까. 밀턴 프리드먼과 애나 슈워츠의 추정을 머리 로스바드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1869~1879년 실질 국민생산은 연 6.8%, 1인당 실질 생산은 연 4.5% 늘었다. 명목 국민생산은 연 3.0% 늘었다. 명목이 실질보다 덜 늘었다는 것은 물가가 연 3.8%쯤 내렸다는 뜻이다.
다만 이 시기를 좋게만 볼 수는 없다. 1873년에는 금융 공황이 있었고,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1873년 10월부터 1879년 3월까지 65개월을 미국 역사상 가장 긴 경기 수축으로 기록한다. 생산은 늘었는데 수축이라는 엇갈린 평가 자체가 당시 자료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공황을 겪은 은행과 철도 회사에겐 실제로 힘든 시기였다. 그래도 물가가 30% 내린 10년 동안 생산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은 여러 추정이 대체로 같다.
3. 물가가 크게 오른 건 주로 전쟁 때였다
더 길게 보자. 같은 미니애폴리스 연준 자료에서 미국 물가 지수는 1800년 51, 1913년 29.7이었다. 연준이 생기기 전 113년 동안 물가는 오히려 40% 넘게 내렸다.
그 사이 물가가 뛴 구간은 대체로 전쟁과 겹친다. 1812년 전쟁 중인 1814년에 63,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에 46, 1차대전 직후인 1920년에 60.2였다. 전쟁이 끝나면 물가는 다시 내려왔다. 1865년 46이던 지수는 1896년 25로 거의 절반이 됐다. 물론 해마다 내린 것은 아니다. 오른 해도, 제자리인 해도 있었다. 장기 추세가 하락이었다는 뜻이다.
같은 지수는 1913년 29.7에서 2025년 967.5가 됐다. 약 33배다.
4. 17개국 100년의 장부
미국만의 이야기일까. 앤드루 앳키슨과 패트릭 키호는 2004년 미국경제학회지 논문에서 17개국, 100년 넘는 자료를 5년 단위로 나눠 살폈다. 5년 평균 물가가 내리면 디플레이션, 5년 평균 생산이 줄면 불황으로 쳤다.
대공황 시기(1929~1934년)를 뺀 나머지에서 디플레이션은 73번 있었다. 그중 65번은 불황이 없었다. 불황은 29번이었는데 21번은 디플레이션 없이 왔고, 그 21번 중 10번은 세계대전과 관련이 있었다. 저자들은 대공황 밖에서는 둘의 연결이 사실상 사라진다고 결론 냈다.
5. 그래도 1930년대는 진짜였다
같은 논문은 예외를 숨기지 않는다. 1929~1934년에는 자료가 있는 16개국 모두 물가가 내렸고 그중 8개국이 불황을 겪었다. 미국 물가 지수는 1929년 51.6에서 1933년 38.9로 약 25% 내렸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따르면 1929년 가을부터 1933년 말까지 약 9,000개 은행이 문을 닫았다.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1933년 「부채 디플레이션 이론」에서 이 과정을 설명했다. 빚이 많은 사람들이 갚으려고 한꺼번에 자산을 판다. 값이 떨어지고 돈의 가치가 오르니 남은 빚의 실질 무게는 더 커진다. 갚을수록 더 빚지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빚이 많은 경제에서 급하게 물가가 내리면 실제로 고통스럽다. 이 반론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여기서 레퍼드의 주장이 나온다. 그는 디플레이션을 가장 두려워하는 쪽이 빚을 많이 진 정부와 금융권이라고 본다. 물가가 오르면 빚의 실질 부담이 녹고, 내리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이 공포의 이유를 일부 설명한다고 본다. 다만 1930년대에 고통받은 사람들은 은행가만이 아니었다.
6. 좋은 하락과 나쁜 하락
그래서 구분이 필요하다. 마이클 보도와 동료들은 2004년 연구에서 19세기 금본위 시대 미국·영국·독일의 물가 하락을 분석했다. 결론은 그 시기 디플레이션이 주로 생산성 향상이 만든 좋은 하락이었고, 대공황의 하락과는 성격이 달랐다는 것이다.
더 잘 만들어서 싸지는 것과, 빚이 터져 신용이 무너지면서 싸지는 것은 다르다. 앞의 것은 풍요가 가격으로 나눠지는 길이다. 뒤의 것은 쌓인 빚이 한꺼번에 정리되는 길이다.
기업가 제프 부스는 『내일의 가격』에서 지금 경제를 브레이크와 액셀을 같이 밟는 차에 비유한다. 기술은 가격을 내리는데 화폐 제도는 물가를 올리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공급이 정해진 돈에서는 좋은 하락이 기본값이 되고, 빚을 키워 성장을 당겨쓰는 유인도 줄어든다고 본다. 물론 그 돈으로 빚을 진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부담이 커진다. 이 점은 초안 「건전한 돈의 세상도 낙원은 아니다」에서 따로 다뤘다.
7. 정리
물가 하락은 그 자체로 불황의 신호가 아니었다. 1870년대 미국은 물가가 30% 내리는 동안 생산이 늘었고, 17개국 100년 자료에서 디플레이션 73번 중 65번은 불황이 없었다. 진짜 위험은 빚더미 위에서 신용이 무너질 때 왔다.
그렇다면 물을 질문은 물가를 올릴 방법이 아니라 빚을 쌓지 않을 방법이다. 기술이 만든 풍요가 같은 돈으로 더 많이 사는 모습으로 모두에게 돌아가는 구조. 나는 그 구조에 가장 가까운 돈이 이것이라고 본다.
기술이 내린 가격표를 저축하는 사람에게 돌려주는 돈이 비트코인이다.
참고 자료
- Atkeson & Kehoe — Deflation and Depression: Is There an Empirical Link? (미니애폴리스 연준 Staff Report 331 / American Economic Review 94(2), 2004) — 17개국 100년, 대공황 외 디플레이션 73건 중 65건 불황 없음, 불황 29건 중 21건 디플레이션 없음(10건 세계대전 관련), 1929~34년 16개국 전부 디플레이션·8개국 불황 (NBER 판 PDF
- Consumer Price Index, 1800– (미니애폴리스 연준) — 1967=100 지수: 1800년 51, 1814년 63, 1865년 46, 1869년 40, 1879년 28, 1896년 25, 1913년 29.7, 1920년 60.2, 1929년 51.6, 1933년 38.9, 2025년 967.5
- Herbener — The Myth of the Great Depression of 1873 (Mises Institute, 2012) — 프리드먼·슈워츠 추정 인용: 1869~79년 명목 국민생산 연 3%, 실질 연 6.8%, 1인당 실질 연 4.5%
- US Business Cycle Expansions and Contractions (NBER) — 1873년 10월~1879년 3월 수축 65개월
- FDIC History 1930–1939 (FDIC) — 1929년 가을~1933년 말 약 9,000개 은행 영업 정지
- Irving Fisher — The Debt-Deflation Theory of Great Depressions (Econometrica 1(4), 1933) — 부채 디플레이션 이론
- Bordo, Landon-Lane & Redish — Good versus Bad Deflation: Lessons from the Gold Standard Era (NBER Working Paper 10329, 2004) — 19세기 미·영·독 디플레이션은 주로 생산성이 만든 좋은 하락
- BLS CPI — Televisions (CUUR0000SERA01) (미국 노동통계국) — TV 물가 2000년 8월 대비 2026년 8월 약 -98% (초안 62에서 계산한 값 재인용)